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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 죽음의 바다 영화 관람 전 명량에서 노량까지 이순신은 무엇을 했을까 이순신 수군 재건 과정

by 맥콜요정 2023.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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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12월 20일 이순신 3부작의 마지막 편 노량 죽음의 바다가 개봉됩니다. 실제 임진왜란(1592년 4월 13일) 발발하고 정유재란(1597년 1월~)이 일어나면서 노량해전(1598년 12월 16일 양력) 끝으로 7년의 전쟁이 끝나게 됩니다. 실제 이순신 장군의 3대 대첩은 역사적 순서로 한산도 대첩, 명량대첩, 노량해전으로 꼽힙니다. 노량 죽음의 바다 영화를 보기 전에 명량 대첩(1597년 10월 25일 양력) 이후부터 노량해전(1598년 12월 16일 양력)까지 417일 동안 이순신 장군은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내용과 노량 영화 관련 이순신 3부작 영화의 총정리를 포스팅해 보겠습니다.

 

 

 

 

노량 죽음의 바다 영화 12월 20일 날 개봉한 이유

 실제 노량 해전은 양력기준으로 1598년 12월 16일에 일어났습니다. 김한민 감독은 최대한 노량 해전이 일어났었던 날짜와 최대한 맞춰서 개봉하고 싶은 뜻이 있어서 2023년 12월 20일 날에 개봉 날짜를 잡았다고 합니다.

 

 

김한민 감독 이순신 3부작 영화

  • 명량(2014)
  • 한산(2022)
  • 노량(2023)

 


 

 

임진왜란 전쟁 사건 타임 테이블로 총정리

사 건 연 도 (음력) 내용
임진왜란 1592년 04월 13일 첫번째 전투는 부산진 전투 모든 것이 부족했던 조선군은 대패함
조선수군의 1차출진 1592년 04월 15일 경상 좌·우수영군 무력하여 일본 수군 저항 받지 않은채 전라도로 진격
옥포 해전, 합포 해전, 적진포 해전 승리함
동래성 전투 1592년 04월 15일 두번째 전투로 동래 부사 송상현 2시간을 버텼지만 전사하고 동래성 함락됨
탄금대 전투 1592년 04월 28일 충주 탄금대에서 왜군이 신립의 부대 격파. 선조는 의주로 몽진(4월 30일)
일본군 한양 함락 1592년 05월 02일 일본군 한양 점령
옥포 해전 1592년 05월 07일 거제현 옥포 앞바다에서 이순신의 조선 수군 첫 승전
합포 해전 1592년 05월 07일 일본 적선 5척을 함포에서 불태우고 남포로 이동
적진포 해전 1592년 05월 08일 적진포에 정박중인 일본 함대 13척 분쇄
조선수군의 2차출진 1592년 05월 29일 (음력) 5월 29일부터 6월10일 걸쳐 적선 70여 척 침몰 시키는 대승
사천 해전 1592년 05월 29일 일본 수군 13척 전멸, 거북선 첫 사용, 이순신 처음으로 왼쪽 어깨 총상
당포 해전 1592년 06월 02일 당포 앞바다에서 왜선 21척 격침
당항포 해전 1592년 06월 05일 당항포에서 왜군 격파
율포 해전 1592년 06월 07일 거제도 율포만에서 부산으로 향한 일본 대선 2척 소선 1척 불사르고 나머지 붙잡음
평양성 함락 1592년 06월 13일 왜군 평양과 함경도 일대 장악. 이후 다급해진 조선은 명에 파병 요청.
조선수군의 3차출진 1592년 07월 08일 7월 8일 한산도 대첩, 7월 9일 안골포 해전에서 승리
한산도 대첩 1592년 07월 08일 학익진으로 일본 47척 분파 12척을 잡는 대승
안골포 해전 1592년 07월 09일 경남 진해 안골포에서 일본군 구키 요시타카 전함 42척 격멸. 3차 출진 마무리
조선수군의 4차출진 1592년 08월 24일 (음력) 8월 24일부터 9월 2일까지 삼천포 서원포 부산포 등 진격해 여러 전투치름
부산포 해전 1592년 09월 01일 부산포에 정박한 일본군 함대와 전투. 일본군 100여척의 적선 파괴함. 정운 전사
진주 대첩 1592년 10월 06일 제1차 진주성 전투. 조선 관군의 진주성 방어 성공
평양성 전투 1593년 01월 08일 조명 연합군 평양성 공격. 일본군 1만 여명 살상. 평양성 탈환
벽제관 전투 1593년 01월 27일 벽제관에서(고양시 벽제동) 조명 연합군 대패
행주 대첩 1593년 02월 12일 행주산성에서 권율의 조선군과 조선 백성들이 일본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
진주성 재침 1593년 06월 21일 제2차 진주성 전투. 일본군 1차 진주성 전투의 보복성 공격으로 승리.
선조 한성 환도 1593년 10월 선조 한성으로 환도
정유재란 1597년 01월 ~ 1594년 말부터 1597년까지 휴전 중 강화 교섭 결렬로 일본군 정유년 재침략
이순신 파직 1597년 01월  이순신 누명과 모함으로 파직. 원균 삼도수군통제사 임명
칠천량 해전 1597년 07월 15일 원균 지휘하는 조선 수군 칠천량에서 일본 수군에게 대패
이순신 복직 1597년 08월 초 이순신 다시 삼도수군통제사 복귀
남원 전투 1597년 08월 12일 8월 15일까지 치뤄진 전투로 일본군의 승리로 남원성이 함락됨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1597년 08월 18일 (음력) 1597년 6월에 병석에 누워 일어나지 못했으며 1597년 08월 18일에 사망
어란포 해전 1597년 08월 27일 이순신 장군 삼도수군통제사 복귀 이후 치른 첫번째 전투. 조선 수군 승리
직산 전투 1597년 09월 07일 충청도 직산에서 일본군과 전투. 조명연합군 승리
벽파진 해전 1597년 09월 07일 이순신 장군 삼도수군통제사 복귀 이후 치른 두번째 전투. 조선 수군 승리
명량 해전 1597년 09월 16일 명량에서 조선 수군 12척이 일본 수군 133여척을 전멸에 가까운 격퇴한 해전 
노량 해전 1598년 11월 19일 조명연합수군 노량해협에서 일본수군 함대와 싸운 전투

 

 위 표의 날짜들은 음력 기준입니다. 영화 노량을 보기 전에 7년의 전쟁인 임진왜란 전체적인 큰 흐름을 시기별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 포스팅과 이순신 3부작 영화를 보기 전에 참고하시면 도움이 되실 겁니다.

 


 

이순신 장군의 3대 대첩

  • 한산도 대첩 : 1592년 8월 14일 양력
  • 명량 대첩 : 1597년 10월 25일 양력
  • 노량 해전 : 1598년 12월 16일 양력

 

 이순신 장군의 3대 대첩은 한산도 대첩 (1592) , 명량 대첩 (1597) 그리고 노량 해전(1598)입니다. 영화 개봉 순서로는 명량(2014), 한산(2022), 노량(2023) 순서이지만 2014년 영화 명량이 성공적인 흥행을 하게 되어서 기존 계획과 달리 김한민 감독은 이순신 장군 3부작 영화를 만들 계획으로 수정하게 되었습니다. 실제 역사적 순서로는 한산도 대첩(1592), 명량 대첩(1597), 노량 해전(1598) 순서입니다.

 

 


 

 

1. 영화 노량 보기 전에 알아야 할 배경지식

1) 1597년 정유년 이순신에게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

  • 누명을 쓰고 파직당하고 백의종군으로 옥살이
  • 3년 7개월간 이순신이  키운 수군 칠천량 해전에서 전멸
  • 이순신 어머니 사망
  • 12척으로 300여 척 일본 수군 상대로 명량에서 승리
  • 셋째 아들 이면, 보복하러 온 일본군에 항쟁하다 전사

 

 영화 노량을 보기 전에 명량해전과 노량해전 사이에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수군을 재건하고 키웠는지를 알고 계시면 영화 노량을 관람할 때 좀 더 깊이 있게 관람할 수 있을 겁니다.

 

 1597년을 정유년이라고 부릅니다. 이순신 장군에게 1597년 정유년에 모든 악재들이 연속이었습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마음이 다급했습니다. 일본군 측에서 이중 첩자인 요시라를 시켜서 조선 조정에 거짓 정보를 흘렸고 선조는 그 정보를 믿게 되어 이순신에게 빠른 시일 내에 부산포 공격을 명령합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전략상 부산을 공격하면 필패할 수밖에 없어서 선조의 명령을 거부하게 되고 이런 분위기에 서인 일부는 이순신을 모함하게 됩니다. 결국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옥에 가두고 고문도 받게 됩니다.

 그와 중에 이순신이 3년 7개월간 키운 조선 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전멸하게 됩니다. 이후 백의종군을 하기 위해서 아산으로 도착한 후 이순신에게 절대적인 존재인 어머님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크게 울부짖으며 큰 상실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후 1597년 음력 8월 초에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하게 됩니다. 그리고 명량에서 12척으로 300여 척의 일본수군과 맞서는 전투에서 기적으로 승리하게 됩니다.

 선조는 명량 대첩에서 승리한 이순신에게 축하의 메시지보다 죽음을 면한다는 의미로 면사라는 메시지를 보냅니다. 이후에 일본군은 이순신을 보복하러 이순신의 고향 아산을 습격합니다. 이순신의 셋째 아들 이면은 일본군에 항쟁하다 전사하게 되고 그 소식은 이순신이 명량대첩을 승리고 끝내고 서해로 올라가 고군산도에서 정박했을때 듣게 됩니다. 이순신은 또 마음이 다 무너질 만큼의 큰 상실감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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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명량 대첩의 승리는 이순신의 죽음을 허락하지 않아

 위에서 언급했지만 정유년은 모진 일들을 연이어서 당한 이순신 장군에게는 지옥 같은 시기였습니다. 명량 대첩은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의 수군이 패배를 해도 납득이 가는 해전이었지만 논리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렵게 기적적으로 이긴 해전입니다. 지금도 어느 누구도 명량 대첩을 어떻게 이겼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도 명량 대첩의 승리는 천운이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정유년에 힘든 일들만 일어났던 이순신 장군에게 명량의 기적적인 승리는 하늘이 이순신에게는 죽음을 허락하지 않아서 천운이 도운 기적적인 승리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입니다. 명량 해전을 승리한 후 곧바로 전북 군산시 고군산도로 이동해 재정비할 시간을 벌였지만 이순신을 쏙 빼닮은 셋째 아들이 일본군의 손에 죽었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2. 명량 이후 이순신 조선 수군 재건 과정  

명량에서 노량까지

 

1) 명량부터 노량까지 417일 동안 이순신은 뭐 했나

  • 명량 대첩 이후 고군산도로 이동
  • 전남 목포 고하도(보화도)에서 통제영 설치 (1597년 10월 29일 음력)
  • 완도 고금도로 이동 고금도 통제영 설치 (1598년 02월 17일 음력)

 

 

2) 명량 대첩 승리 후 곧바로 고군산도로 이동

 명량 대첩을 승리로 만들었지만 한산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12척으로 명량 같은 승전을 두 번 다시 바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곧바로 서해로 가 전북 군산시에 있는 고군산도에 정박하게 됩니다. 그곳에서부터 이순신 장군은 조선의 수군을 재건하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충무공 이순신 명량 이후 고하도 겨울나기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58회]-고하도 겨울나기와 고금도 통제영 - 시민의소리

# 고하도에서 겨울 나기이순신은 아들 면의 죽음에 비통하면서도, 일상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1597년 10월 20일부터 이순신은 겨울나기 준비를 착실히 하였다.해남 등지에서 군량을 확보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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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과 고하도

 

이순신과 역사의 섬 고하도

고하도 역사재조명 학술대회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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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남 목포 고하도에서 통제영 설치 : 조선 수군 재건 시작  (1597년 10월 29일 음력)

  • 서해를 거쳐 서울로 가는 길목으로 일본의 서북풍 진로를 막기 위함
  • 가까운 영산강이 위치해 호남으로 진입이 용이함
  • 전선에서 군량 공급받기 용이한 위치
  • 전함들을 숨기기 용이한 곳
  • 명량 이후 조선 수군의 재건 시작
  • 해로 통행첩 시행

 

 이순신 장군은 조선 수군들을 전남 목포 고하도로 이동해 통제영을 설치하고 조선 수군의 재건을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수군들을 굶길 수 없고 진을 치고 재건을 하는데 군량이 꼭 필요했습니다.

 이순신과 참모들은 백성들에게 곡식 일부를 받아서 해로통행첩을 주기로 합니다. 해로통행첩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해로 통행을 할 수 있고 어업활동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제도로 조선의 백성과 일본군의 세작들을 구별할 수 있으며 동시에 군량과 군자금을 확보할 수 있게 됩니다.

 

 조선 수군을 쫓아온 피난민들과 백성들은 배에 싣고 다니는 곡식 일부를 내놓고 통행첩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통행첩을 갖고 있는 백성들과 피난민들은 통제영이 있는 지역에서 조선 수군의 보호를 받으면서 안전하게 어업활동과 농사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안정화가 된 조선 수군은 한겨울 동안 전투에 쓰일 배들을 건조할 수 있게 되었고 1598년 봄(입춘)이 오기도 전에 40척이 넘는 전선을 건조하게 됩니다. 안정적으로 전선이 늘어나니 병사들의 수도 늘어나게 되고 창고에는 군량미가 쌓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전 한산의 통제영만큼은 아니지만 옛 통제영의 모습으로 만들어나가는 모습이었고 이렇게 전남 목포 고하도에서 108일 동안 조선 수군의 재건을 잘할 수 있게 됩니다.

 

 

이순신의 마지막 통제영 고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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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남 완도 고금도로 통제영 이동 (1598년 02월 17일 음력)

  • 겨울이 지나서 완도 고금도로 진을 옮김
  • 이순신 생전 마지막 통제영
  • 호남의 바다 통제 가능한 위치
  • 한산보다 좋은 형세
  • 경작지가 넓은 고금도
  • 1500여 호의 백성이 살고 있었던 고금도
  • 군량 확보 용이한 여건 고금도 
  • 명나라 수군 파병

 

 조선의 수군은 겨울이 끝나자마자 완도 고금도로 이동해 이순신 생전 마지막 통제영을 설치해서 다시 힘을 비축하게 됩니다. 고금도에서 조선의 수군은 함대 80여 척으로 늘어났고 군사도 8천 명에 이르러 수군의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으며 고금도 통제영 시기에 명나라에서 수군을 보냈습니다.

 

 

이순신 장군 밥상 재현

 

 

5) 임진왜란 중 이순신 장군 밥상과 조선 수군의 식생활

 이순신 장군의 밥상은 소박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평소 위장병이 심해서 좁쌀을 즐겨 드셔서 밥상에 좁쌀죽이나 좁쌀 밥 위주로 구성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국은 주로 연포탕(두부탕)을 먹었다고 합니다.

 

 반찬은 무김치와 나물 위주로 드셨습니다. 이 당시에는 아직 고춧가루가 조선에 유입되지 않아서 김치는 하얗습니다. 그리고  조선시대 사람들은 식사할 때 밥(탄수화물)을 고봉밥처럼 많이 먹어서 탄수화물을 잘 소화시키기 위해 무를 많이 먹었습니다.

 

 그만큼 조선시대에는 무가 가장 중요한 식재료였고 무로 만든 반찬이 필수였던 시대입니다. 고추는 임진왜란 이후에 본격적으로 조선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김치도 지금처럼 빨간 배추김치와 달리 흰 무김치가 대표적인 김치였습니다. 

 

 난중일기에 해산물이 자주 언급되는데 그중에 청어가 많이 나옵니다. 그만큼 이순신 장군은 해산물 반찬을 즐겨 먹었습니다.  청어는 말려서 과메기로 먹을 수 있고 회로도 먹을 수 있어서 군량으로도 쓰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청어를 수만 마리씩 잡아 육지에 팔아서 군량뿐만 아니라 군 자금줄로 만들어서 조선 수군을 재건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전투와 훈련때는 주먹밥과 젓갈이 필수였습니다. 남해에서 활동하다 보니 해산물을 쉽게 구할 수 있었고 특히 젓갈을

대량으로 만들어 병사들과 백성들까지 함께 즐겨 먹었다고 합니다.  일반 식사를 할 때 젓갈은 반찬으로 즐겨 먹었고 전투 때나 훈련 때 주먹밥과 함께 젓갈을 같이 곁들어서 많이 먹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해조류와 어패류도 즐겨 먹었는데 녹조류 홍조류 갈조류 등 여러 종류의 해초들을(미역, 톳, 파래, 몰) 각각 조금씩 한 접시에 같이 담아서 반찬으로 먹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복도 자주 먹을 수도 있지만 주로 선물용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사냥할때 획득한 노루고기나 아니면 본인의 생일 같은 특별한 날에는 소고기를 즐겨 먹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우리나라 토종돼지는 지금 보편화되어 있는 서양돼지처럼 덩치가 크지 않고 작았습니다.

 

 특히 돼지가 먹는 것과 사람이 먹는 것이 같아서 조선시대에 돼지를 사육하면 오히려 손해를 봅니다. 사람이 먹을 음식을 돼지한테 먹여서 키우게되면 우리나라 토종돼지가 지금의 서양돼지처럼 덩치가 크지 않아 비효율적이라 남는 게 없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돼지를 사육하지 않았고 주로 소를 사육하였고 소고기를 돼지고기보다 즐겨 먹었습니다.

 

 그리고 전투에서 이기면 잡았던 짐승들을 양념에 재우거나 꼬치에 끼워서 구워먹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는 꿩사냥이 군사훈련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지금과 달리 닭보다는 꿩을 즐겨 먹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어머니를 여의고 나서부터는 단백질 고기 종류는 다 끊었다고 합니다. 채소식 위주의 식단으로만 식사를 쭉 했다고 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밥, 술, 반찬, 음식 등을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한 음식으로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먹을 수 있는 여러 음식들 하나하나 소중하게 여기면서 먹어 나를 살리고 부대를 살리고 나라를 살리기 위한 소중하고 고귀한 음식으로 여겼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있는 지역에서 사는 백성들은 보호받으면서 살고 있는 감사함에 밥을 지어서 이순신 장군이나 아니면 장군의 종 노비들에게 지은 밥을 주면 장군은 그 밥들을 그냥 받지 않고 그만큼 쌀로 갚아줬다고 합니다. 그리고 종과 노비들에게 쌀 밥을 얻어먹고 다니지 말라고 교육시키고 장군은 평소에 쌀을 항상 가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쌀을 항상 가지고 다녔던 이유는 장군이 먹을 밥은 직접 갖고 다니는 쌀로 해결하기 위한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백성들이 먹을 쌀을 장군이 먹게 되고 그러면 백성의 쌀을 뺏어 먹은 꼴이 되어서 장군은 항상 자신의 쌀을 가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기본적으로 쌀이 돈처럼 값어치가 있었고 돈이 없으면 돈 대신 쌀로 물건을 살 수 있었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음식 자체가 돈처럼 귀했습니다. 전쟁 중에 백성들은 먹고살기 힘든데 백성이 이순신 장군에게 보호받으며 살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 장군에게 쌀이나 밥을 주는 것이 그 백성 입장에서는 몇 끼니를 굶고 어렵게 준다는 걸 이순신 장군은 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백성이 주는 쌀과 밥을 쉽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보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수군을 운영하고 재건하는 동안 자신의 밥상은 소박했지만 백성과 병사들을 위한 군량 및 식사와 음식들은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에 병사들과 백성들을 위해 준비한 밥상들을 보면 영양학적으로 부족함 없이 잘 갖춰진 음식들로 이뤄졌습니다. 병사들과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들은 작은 것 하나 꼼꼼히 챙기신 이순신 장군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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